예술의 모든 것을 참조하세요. CC NOW CC ME! "처음엔 시집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해설을 읽어 보니 '습관'에 관한 내용이더라고요."
- 주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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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님께,
서점 직원의 은밀한 취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디자이너는 책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고, MD는 책의 관점 포인트를 찾아 독자에게 소개하는 공간, 더레퍼런스. 그 안에서 저는 큐레이터로 일하며 전시 기획에 필요한 다양한 시선과 아이디어를 찾아 나섭니다.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듯이요. 서가는 생각의 가지들을 펼칠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오늘은 그중 어떤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저는 올해 준비 중인 4월의 첫 전시를 고민하며 곱씹는 책을 한 권 들고 왔습니다. 책을 매개로 던지는 질문과 아이디어가 전시장과 서점에서 어떤 자극이 되는지, 더레퍼런스의 풍경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from 큐레이터 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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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거짓, 그 경계에서
세인📗 | 저는 올해 더레퍼런스 기획 전시 때문에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을 자주 떠올리게 되네요. 원서가 2008년에 나왔는데, 한국어판은 2019년에 워크룸프레스(workroom press)에서 출간됐어요. 보통 다큐멘터리는 객관적 기록으로 여겨지지만, 슈타이얼은 다큐멘터리가 픽션과 뒤얽혀 현실을 특정 방식으로 구성하는 일종의 서사 형식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다큐멘터리로 접하는 세계는 결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생산해낸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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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 내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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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하면 보통 사진이 떠올라요.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은 예전만큼 두드러지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눈앞의 현실과 가장 닮은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잖아요. 그래서 사진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제일 드라마틱하게 넘나들 수 있는 복잡하고 문제적인 매체인 것 같아요. 올해 더레퍼런스 전시 기획에서 '사진'이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여서, 자꾸만 이 책을 펼쳐 보게 되네요.
유정📕 | 2022년 MMCA에서 《히토 슈타이얼 - 데이터의 바다》를 봤는데, 전시에서도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지닌 필름 에세이 영상 작업이 많았어요.
혜빈📙 |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장르가 있는 건가요?
세인📗 | 특정한 장르라기보다 사진의 어떤 속성을 설명하는 방식에 가깝죠. 예를 들어 이갑철 작가의 『충돌과 반동』 시리즈는 굉장히 주관적인 사진이잖아요. 한국의 전통적 삶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이걸 객관적인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태도로 찍힌 사진과는 거리가 멀죠. 대신 이런 사진을 한 개인의 증언이나 기억으로서의 '다큐멘터리'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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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아📘 | 관련해서 김익현 작가와, 콘노 유키 큐레이터의 『로그 ログ』가 생각나네요. 2011년 도호쿠 대지진으로 방사능 피해를 입은 이후 후쿠시마와 미야기현에 여러 차례 방문해서, 그곳에서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기록한 책이에요. 동행자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고요. 김익현 작가는 처음 현장을 방문했을 때 곧바로 카메라를 들 수가 없었대요. 아무래도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윤리적 문제의식이 연결됐겠죠. 사진으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보단, 사진 매체를 다각화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한 책이에요. 오랜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다르게,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정📕 | 저는 『로그 ログ』를 다큐멘터리라기보다 에세이라고 받아들였어요. 어떤 사건과 현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단상들이나 사건을 둘러싼 시간들을 기록했다는 느낌에 더 가까워서요. 슬아님 이야기를 들으니 사진의 결 자체가 다큐멘터리적이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네요.
슬아📘 | 오히려 다큐멘터리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려고 하다 보니 조금 더 사진적인 맥락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현📓 | '사적 다큐멘터리'로서의 사진들이 있잖아요. 국내에는 황예지 작가처럼 사적 다큐멘터리를 다루는 작가들이 많다 보니, 다큐멘터리의 범주가 엄청 넓어졌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에서 사진을 배울 때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말하자면 'T스러운' 작업들이 많은데, 모든 사진이 어느 정도의 도큐멘트적이고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로그 ログ』도 당연히 다큐멘터리라 생각했고, 오히려 다큐멘터리를 '장르'로서 바라보는 게 더 신기하게 느껴져요.
세인📗 | 그러고 보니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본 아벨 로드리게즈(Abel Rodríguez)의 그림들이 떠올라요. 작가는 아마존 원주민의 후손인데, 사라져 가는 아마존 우림에 대한 본인의 기억을 그려요. 동화책 삽화를 연상케 하는 굉장히 주관적인 필치의 그림이면서도, 숲에 대한 백과사전에 가까운 자료를 표방하는 형식을 취해요. 그게 큰 울림이 있더라고요. '사적 다큐멘터리'와 맞닿은 발상을 끝까지 밀어붙인 작업이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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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el Rodriguez, “Terraza Alta V”, 2018 ⓒ Abel Rodrigu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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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규칙
세인📗 | 슬아님이 들고 있는 그 책은 뭐죠?
슬아📘 | 제가 보고 있던 건 이주현 디자이너의 『현상이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쪽의 뒤에 남은 자취』라는 책이에요. 책의 오른쪽엔 텍스트, 왼쪽엔 그걸 도식화한 이미지가 있어요. 처음엔 시집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해설을 읽어 보니 '습관'에 관한 내용이더라고요. 프랑스의 '잠재문학실험실'인 울리포(Oulipo)의 'S(Substantif, 불어로 '명사'를 뜻한다)+7'이라는 제약을 가지고 작가 스스로 습관이라는 규칙을 게임처럼 사용한 거고요.
저는 울리포 회원이기도 했던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을 좋아하는데, 제가 작업할 때도 공간에 지면을 이용해 텍스트를 배열하는 등의 형식 실험을 해왔어서, 이 책이 울리포의 규칙을 적용했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울리포는 당시에 전위적 태도를 취하거나 뭔가를 전복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고 해요. 울리포의 제약은 문장 속 명사를 다른 걸로 대체하는 식의 규칙을 만들어서 문학에 적용하는 거예요. 그 규칙 때문에 문학은 무한히 생산될 수 있죠. 그렇게 생산된 문학이 가치가 있는지는 부차적인 측면이고, 가치가 없더라도 규칙을 이용해 문학을 게임처럼 향유하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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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이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쪽의 뒤에 남은 자취』 내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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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는 게 아니라 강요에 의해 사유한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인간은 어떤 사건이나 만남이 발생해야만 사유하는 수동적 존재라는 거예요.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처음에는 사유하려고 되게 많이 노력했거든요. 시집인 줄 알고요. 그런데 해설을 보니까 울리포의 실험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좀 바보가 된 것 같더라고요(웃음). 이 책을 보면 사유를 강제하는 느낌이 들어서 재미있었어요.
혜빈📙 | 개인 작업에 참고하려고 읽었던 책인가요?
슬아📘 | 그렇다기보단 제가 예전에 한창 뭔가를 수집하고, 리서치하고, 그걸 텍스트로 만드는 일종의 매체 실험을 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울리포를 알게 되었고, 울리포의 활동이 뭔가를 소진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 질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나를 소진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책에 '소진된 인간의 자세'가 나오는데, 누우면 안 되고 앉아 있어야 한대요. 누우면 회복하잖아요(웃음). 요즘도 '내가 완전히 소진되는 건 어떤 상태일까'와 같은 생각들을 해요.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을 다시 보니까 새롭더라고요.
혜빈📙 | 슬아님은 정말 보고 접하는 모든 게 리서치네요(웃음). 서점에 오는 손님들에게도 인기 있는 책인가요?
슬아📘 | 체감으로는 꾸준히 팔리는 책들 중 하나예요. 이주현 디자이너의 『PIANO ÉTUDE CORONA』라는 책도 재미있어서 추천하고 싶어요.
혜빈📙 | 확실히 가벼운 볼륨의 책이나 전시 연계 도서가 잘 팔리는군요.
유정📕 | 맞아요. 일단 작은 책들이나 전시 연계 도서는 대형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니까요. 일반 도서는 대형 서점에서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고 택배 배송도 되니, 그런 책보다는 서소문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책들이 더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혜빈📙 | 얼마 전 유어마인드(YOUR-MIND)에 갔는데, 작은 책들을 진열하는 매대가 따로 있었어요. 벽면에는 책갈피를 잔뜩 모아 두고, 심지어 작은 책 자판기도 있잖아요. 서점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니즈가 많이 확실해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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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경계, 사진의 속성, 그리고 실험적인 글쓰기까지, 책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각을 세상과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생각이 열리고,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무한의 고리는 누구에게나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을 뻗어 책을 펼쳐 보세요. 그 멋진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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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레퍼런스 직원들을 소개합니다!
혜빈📙(디자이너)ㅣ책을 통해 세상을 살펴보는 겉촉속바형 디자이너
유정📕(MD)ㅣ호시탐탐 새로운 일을 모색하는 야무진 아티스트 MD
지현📓(파트타이머)ㅣ디자인적 사고를 꿈꾸며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형 알바생
슬아📘(MD)ㅣ보고 듣는 모든 것이 리서치. 다재다능 아티스트 MD
세인📗(큐레이터)ㅣ무엇이든 뾰족하게 파고드는 사냥꾼형 기획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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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히토 슈타이얼
워크룸프레스, 2019
₩ 1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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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이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쪽의 뒤에 남은 자취』
이주현
몽타주프레스, 2021
₩ 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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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Sung Hwan Kim: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
Janine Armin
Afterall Books, 2025
₩ 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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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The Colors of Time』(2023)
+ 『Myonghi Kang: Origins2』(2022)
강명희
VILLEPIN
₩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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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는 어떤 의미인가요?
‘참조하라’는 뜻의 더레퍼런스 뉴스레터 약자입니다
아티스트처럼 세상을 발견하고 탐색하고 공유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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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레퍼런스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24길 44, 2F T. 070-4150-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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