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모든 것을 참조하세요. CC NOW CC ME!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세계. 그러나 낯설지 않은 풍경."
- 주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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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레퍼런스 뉴스레터 APRIL 18,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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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님께,
안녕하세요, 만화 읽어 주는 MD 주슬아입니다.
‘겪어 본 적 없는 시대를 그리워하는 마음’, 경험해 보신 적 있나요? 저는 판판야(panpanya)의 만화를 읽고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껴 본 것 같아요. 세밀하게 그린 배경 위에 현실과 공상이 뒤섞인 그의 세계는 낯설지만 어쩐지 익숙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평화로운 판타지, 고어 다크 판타지에 이어 오늘은 기묘한 판타지를 이야기하려고 해요. 소개할 작품은 판판야의 단편집 『게에게 홀려서』, 『물고기 사회』, 『모형 마을』입니다.
그의 만화는 짧은 꿈 한 토막 같아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어딘가에서, 언젠가 느껴 봤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조용히 건드립니다. 작품 속에는 어디인지 모를 장소, 존재를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들, 맥락 없이 끼어드는 장면들이 등장해요. 처음엔 기묘하고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안에는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향수’, 혹은 ‘존재하지 않는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숨어 있어요.
그래서일까요? 책장을 덮은 뒤에도 자꾸만 생각나고, 마음 한켠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죠. 살아 본 적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 경험—판판야가 그리는 이 낯선 풍경은 어쩌면,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현대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from MD 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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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장소를 향한 방황
판판야의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산책’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을 의미하지 않아요. 그것은 목적 없는 발걸음과 방향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풍경을 관찰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 안으로 스며드는 과정이죠. 그 상징성은 『게에게 홀려서』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길을 걷던 주인공은 우연히 한 마리 게와 마주치고, 충동에 이끌려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해요. 게를 따라 도시를 헤매는 그의 여정은 점점 낯설고 이질적인 체험으로 변해 갑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산책’은 도시라는 공간이 기억과 무의식, 상실과 환영이 뒤엉킨 미로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요.
이 장면은 프랑스 인류학자 마크 오제(Marc Augé)가 말한 ‘비장소(non-place)’ 개념과 맞닿아 있어요. 분명 존재하지만, 역사도 정체성도 기억도 희미한, 그래서 ‘머무를 수 없는’ 공간들—그곳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존재들만 머뭅니다. 판판야는 이런 공간들을 재치 있게, 때로는 슬픔을 담아, 낯선 감각으로 그려 내요. 꿈 같기도, 현실 같기도 한 풍경 속에서 뜬금없이 나타나는 존재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죠.
그 순간 우리는 알 수 없는 아릿한 그리움을 느끼며, ‘속해 있음’의 감각을 서서히 잃어 가요. 판판야는 이 무의식의 흐름을 포착하며, 살아 본 적 없는 시간과 공간에 왜 우리는 그리움을 갖는지, 조용히 묻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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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곳에서 발견한 도시의 마법
「방황하는 바보」는 지하철에서 깜빡 잠이 든 주인공이 낯선 역에 도착하면서 시작돼요. 익숙하던 골목이 갑자기 기묘하고 불안한 공간으로 변하고, 그는 자신이 ‘유체이탈’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죠. 함께 걷는 레오나르도 또한 실체가 모호합니다. 둘은 잃어버린 육체를 찾아 도시를 헤매지만, 결국 그 몸을 되찾은 뒤에도 동네의 정체는 여전히 불투명하게 남아 있어요.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진 이 산책은, 익숙했던 도시가 어느 순간 낯설고 이상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형 마을』의 「여기는 어디일까요 여행1」에서는 예기치 못한 장소에 떨어진 주인공이 주변을 탐색하며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 흥분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등교의 달인」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등굣길이 친구와의 우연한 동행, 소소한 간식,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 특별한 모험으로 탈바꿈해요. “경계가 모호해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처럼, 도시는 언제나 질서 정연한 체계가 아니라 모호함 속에서 뜻밖의 감각과 기쁨을 발견하게 해주는 공간이죠.
오늘 소개한 만화 속 ‘산책’은 길을 찾기 위한 여정보다는, 오히려 일부러 길을 잃고 헤매는 경험에 가까워요. 지도에도 없는 길, 엉뚱하게 놓인 계단, 우연히 마주친 낯선 가게 같은 요소들은 ‘잃어버린 기억’과 ‘겪어 보지 않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도시라는 무대는 그렇게 상실과 발견의 순간들이 교차하는, 마법 같은 공간으로 다가와요. 우리가 품고 있던 도시의 고정관념까지도 흔들리게 만드는 그 낯선 감각—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판판야가 보여 주는 ‘도시의 마법’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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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 gpt 4.0이 그린 골목 풍경,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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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수 없는 장소에 대한 그리움
『물고기 사회』 속 「선물의 마음가짐」은 고속도로 휴게소라는 ‘중간지점’을 무대로 펼쳐지는, 색다른 도시 체험을 그려요. 주인공은 휴게소에서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려 애쓰지만, 결국 기성품 대신 직접 농사를 짓고 도자기를 빚는 방법을 택합니다. 처음엔 꽤나 과장된 열정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의 진지한 태도가 의외로 유쾌하게 다가오기도 해요.
“휴게소를 목적지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현대 도시가 점점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변해 가고 있음을 암시해요. 여기서 마크 오제의 ‘비장소’ 개념과 다시 한 번 맞닿는데, 도시는 분명 존재함에도 역사와 정체성, 개인의 기억을 담지 못하면 ‘머물 수 없는’ 공간이 되고 말아요. 휴게소에 들르는 사람들처럼 도시를 지나는 이들은 잠시 머물다 곧 떠나버리는 익명의 통행자일 뿐이죠.
판판야는 이런 비장소적 특성을 재치와 쓸쓸함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보여 줘요. 익숙했던 풍경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모호한 장면과 맥락 없이 등장하는 이상한 존재들이 독자의 감각을 흔들어 놓는 거죠. 그럴 때 우리는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힌다거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애틋한 그리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왜 그토록 그리워하는지,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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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사람은 익숙함을 찾기 마련이다.”
요즘따라 문득, ‘익숙한 것들’에 의지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복고풍 디자인, 오래된 음악, 낡은 영화, 골목길. 한때는 촌스럽고 구식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오히려 따뜻하고 아름답지 않나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 안의 불안정과 정체성의 혼란을 달래기 위한 감각의 본능일지도 모르겠어요. 판판야의 만화는 이런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건드려요.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그 길에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고, 그 여정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요. 길을 잃고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도착하며, 마침내 자신도 몰랐던 감정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순간, 독자 역시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히게 돼요. 그 감정은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가 아닐 수도,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미래일 수도 있어요. ‘가능했을 수도 있는 세계’에 대한 아련한 상상. 판판야는 우리 안의 무의식을 조용히 불러내며, 스스로를 들여다볼 기회를 건넵니다.
우리는 점점 더 목적지 중심적인 삶에 익숙해지고 있어요.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목적 없는 걷기’, ‘미지의 장소를 향한 방황’은 의미 있을까요?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건, 이 세계 어딘가에 아직 내가 모르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 조용히 되묻고 싶어요.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잃어버리는 행위’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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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도서
판판야(글, 그림), 『물고기 사회』, 미우, 장지연(번역), 2022
판판야(글, 그림), 『모형마을』, 미우, 유유리(번역), 2023
판판야(글, 그림), 『게에게 홀려서』, 미우, 장지연(번역), 2020
Mark Fisher, 『Ghosts Of My Life』, Zer0 Books, 2022
Marc Augé, 『Non-Places: An Introduction to Supermodernity』, Verso,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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